수원향교 水原鄕校
수원향교 홍살문, 능이나 궁정, 관가 등의 입구에 세우는 붉은 칠한 문으로 둥근기둥 2개를 세우고 지붕없이 붉은살을 박았다. 향교의 홍살문 안에는 위대 하신 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므로 홍살문을 지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경건한 마음으로 지나간다.
수원향교 하마비, 하마비는 조선왕조시대에는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날 때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가진 비석이며 이는 궁가(宮家), 종묘(宗廟), 문묘(文廟) 등의 앞에 세워져 있으며 신분에 따라 1품 이하는 10보, 3품 이하는 20보, 7품 이하는 30보, 거리에서 내려서 걸어 지나가게 되었다.
수원향교는 1291년(고려 충렬왕 17년) 당시 수원의 읍 중심이었던 화성시 봉담읍 와우리 화산 앞에 세워져 있었다.
그 후 1789년(정조13년) 가을 500년 가까운 세월을 화산앞 구읍지에 세워져 있던 것을 정조대왕이 부왕(父王)인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을 양주 배봉산에서 현재의 화산으로 천장(遷葬)하기 위하여 수원읍지를 팔달산 동쪽 현재 4대문 안으로 옮길때 현재 위치인 교동43번지에 이전 건축하게 되었다. 처음 이전 당시에는 급히 서두른 탓으로 목재 대부분은 구건물의 것을 재활용하였으며 건물의 하부가 물에 잠기어 목재가 썩는 등 문제가 발생하여 1795년(정조19년) 개축하게 되었고 그 후에도 훼손되거나 화재로 인하여 수차에 걸쳐 보수하여 왔다.
향교는 성균관(成均館)의 하급관학(官學)으로 일명 향학(鄕學)이라 불렸으며 지방에 유일한 공립중등교육기관으로서 수재를 모아 학문을 강습하여 왔다.
수원향교 외삼문
수원향교 외삼문 옆 비석군
수원향교를 들어서면 공자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공자상은 중국 제남시와 수원시의 자메도시체결 10주년을 기념하고 양시의 지속적인 우호증진을 위해서 2003년 10월 12일 중국 제남시에서 기증한 것이다.
전학후묘의 전통적인 배치인 수원향교의 문묘 앞에는 유생(儒生)들이 학습하던 명륜당(明倫堂)이 있고 그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숙하던 동.서재가 있는데 주로 동재에는 양반계급을 서재에는 그이하 계급을 기숙하게 하였다. 관찰사(觀察使)는 도내에서 우수한 유생들을 골라 매년 6월에 도회소(都會所)를 열고 문관(文官)을 보내어 시험을 보아 성적이 좋은 자는 생원(生員), 진사(進士), 복시(覆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고 한다.
수원향교 동재와 서재(사진 아래), 동재와 서재는 1789(정조13년)에 이전 건축 되었고, 1795년(정조19년)에 재건축하였다. 화재로 인하여 1970년 11월에는 서재를 1996년 9월에는 동재를 복원하였다.
수원향교 내삼문
대성전은 대성지성 문선왕이신 공부자(孔夫子)의 유덕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는 문묘(文廟)이다. 이곳에는 공부자의 위패(位牌)를 정중앙으로 오성(五聖) 송대(宋代)의 2현(賢), 한국의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향교에 제사공간을 두어 정기적인 제사를 시행하였던것은 이를 통하여 여기에 모셔진 유현(儒賢)들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고 배우게 하고자 함이었다. 지금도 수원향교에서는 매월 초하루(1일) 보름(15일)에 분향하며 봄과 가을에는 석전대제를 봉행하고 명륜대학과 청소년인성교육과정을 통하여 유현들의 학문도 계승하고 있다.
수원향교 문묘배향
수원향교 동무와 서무
대성전에 동 서쪽 아래채에 있는 건물인 동무와 서무는 유현(儒賢)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해방과 더불어 위패를 대성전으로 올려다 모시고 지금은 부속 건물로 이용하고 있다.
수원향교를 관람하기전 인사드린 송중섭 전교께서는 수원향교는 칠백여년의 장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유서 깊은 곳으로 향교의 임무인 선성 선현의 향사와 지방의 유일한 교육기관으로서 전통적인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미풍양속을 함양하여 사회기능을 교화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며 1994년부터 명륜대학 유학과를 개설하여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 유교의 경전을 가르쳐 전통 윤리를 보급하고 있고, 부설로 한문반, 서예반, 한시반, 다도반, 청소년 인성교육을 무료로 병행하는 등 향교 체험교실을 운영을 통한 전통문화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고 소개하여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