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가장 큰 절터인 익산 미륵사지에 다녀왔습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백제유적지구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오층석탑에서는 8월 13일부터 29일까지 2021 세계유산축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백제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년 7월 8일,독일의 본에서 개최된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전 인류의 유산이 되었다. 유네스코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인정하면서,백제역사유적지구를 통해 동아시아의 문명 형성에 이바지한 백제의 역할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세계유산 등재 기준
(ii) 특정 기간 • 지역 내 중요한 인류 가치 교류의 증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고고학적 유적과 건축물은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에 존재하였던 고대 동아시아
왕국들 간에 진행된 건축기술의 발전과 불교의 확산을 가져온 교류를 보여준다.
(iii) 문화적 전통 또는 문명에 관한 독보적이거나 특출한 증거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대한민국 중 서부에 있는 백제의 왕도(왕궁이 있는 도시나 도읍)와 밀접하게 연관된 유적으로, 주변국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문화적 발전이 절정에 이른 백제 후기(475-660)를대표하는 유산이다.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660년까지 약 700년간 이어진 한국의 고대 왕국 중 하나이다.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의 도읍들과 연관된 백제 후기의 유산으로, 웅진 왕도 관련 유적인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사비도성 관련 유적인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 정림사지 • 능산리 고분군 • 나성,금마저(익산)왕도와 관련된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등 8개의 유적으로 구성된 연속유산이다.
사적 제150호인 익산 미륵사지는 남아 있는 백제 시대의 절터 가운데 가장 크며, 미륵사는 무왕 대(600-641 재위)에 지어졌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무왕과 왕비가 사자사에 가는 길에 지금의 미륵산인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연못을 메우고 세 곳에 각각 탑과 법당, 회랑(주요 공간을 둘러싸며 지붕이 있는 복도)을 짓고, ‘미륵사' 라 하였다고 한다.
1980년부터 1994년까지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를 하였는데, 세 곳에 각각 탑과 법당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것이 확인되어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지붕 양 끝을 장식하는 기화인치미, 녹색 유약 을 입혀 서까래 끝에 놓아 장식하는 기와인 녹유서까래기와, 석등 받침돌인 석등하대석, 전각이나 탑의 처마에 매다는 풍경인 금동풍탁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과 절의 독특한 배치 방식에서 백제 문화의 독창성과 탁월함을 엿볼 수 있다. 법당 아래 빈 공간이 있었고 고려와 조선 시대의 건물터에서 온돌이 발견되는 등 건물터와 유물로 보아 미륵사가 1600년대까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으로 2001 년부터 해체, 보수하기 시작하여 2017년에 조립을 마쳤다. 2009년에 석탑을 해체하다가 탑 안의 중심에 세운 기둥돌 1 층에서 사리를 넣으려고 만든 구멍을 발견하였으며,이 사리공 안에서 사리를 넣어 둔 항아리인 금제사리호 등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또한, 미륵사를 짓고 탑을 세운 내용을 기록한 사리봉영기도 함께 발견하였다. 미륵사지에는 석탑,당간지주사찰 문 앞에 깃발이나 불화를 꽂는 기둥 받침대, 석등하대석, 금동향로, 사리장엄구를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미륵사지는 독창적인 가람절, 사찰 배치, 목조 건축 기법을 알 수 있는 석탑, 백제 공예 문화의 수준을 보 여주는 사리장엄구, 유적의 연대를 명확히 밝혀 적어둔 사리봉영기 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국보 제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본래 미륵사에는 3기의 탑이 있었다. 중원(中院)에는 목탑이,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에는 각각 석탑이 있었다. 중원의 목탑이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동·서원의 석탑 중 동원의 석탑은 발굴 당시 완전히 무너져 내려 석탑에 이용된 석재들이 주변에 흩어지고 그 중 일부는 외부로 유출되어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서원의 석탑은 최근까지 불안하게나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많은 부분이 훼손된 채 동북 측면으로만 6층까지 남아 있었다.
일제는 1915년 석재들이 일부 무너져 내린 미륵사지 석탑을 콘크리트로 긴급 수리했고 이후 석탑은 약 80년을 콘크리트에 엉겨 붙은 채 버텨왔다.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 안정성이 우려되어 2001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석탑의 해체조사 및 보수정비를 추진했고 해체가 완료될 무렵인 2009년에는 미륵사를 창건한 인물이 '좌평 사택적덕(沙宅績德)의 딸이자 백제 왕후'이고, 사찰 건립 시기가 639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리봉영기가 발견됙도 했다.
20여년에 걸친 보수 공사를 거쳐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최대(最大)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은 부재 1천627개를 짜 맞춰 새롭게 완성됐고 2019년 4월 30일 준공식을 가졌다.
높이는 14.5m, 폭은 12.5m, 무게는 약 1천830t이다
1974년 동원의 탑 터를 발견하여 기단의 규모와 형태 및 출토 유물을 조사한 결과, 국보 제11호인 서탑과 같은 백제시대의 석탑이 있었음이 밝혀졌고 동원 구층석탑은 동원 탑 터에서 나온 기단석, 지붕돌인 옥개석, 탑의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를 받치는 노반석 등의 탑 부재와 현재 남아 있는 서탑 등으로 고증되어 1991년 복원을 시작 1992년에 완료했다.
복원된 구층석탑은 아래 기단의 한 변이 12.5m, 위 기단의 한 변이 10.5m인 이중 기단이다. 탑 높이는 지면에서 상륜부까지 총 27.8m이다. 탑의 지붕돌에 달린 풍탁은 동원 탑 터에서 나온 백제시대 금동풍탁을 복제한 것이다. 탑 북원에는 기존 탑 부재와 갈은 재질인 악산 황등에서 캐낸 화강암 2,000여 개와 백제시대 석탑 기단석과 탑신석 32개를 포함하여, 석재 2,700여 톤을 사용하였다. 석탑 복원 기록과 사리를 담은 용기인 사리장엄을 5층 심주석에 모셔 두었다.
중원 목탑 터
중원 목탑 터는 나무로 만든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었는데 발굴 조사를 했을 때 기단 앞에서 불에 탄 기와들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화재로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미륵사지 석등하대석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3호
미륵사지 석등하대석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3호
미륵사지 중원 금당 터
미륵사지 동원 금당 터
풍탁(風鐸)은 지금은 풍경(風磬)이라고도 불린다.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처마에 걸려 있는 건축 장식물로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나 난다고 하여 풍탁이라고 한다.
미륵사지 동탑에서 바라본 서탑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보물 제 236호로, 높이 395cm이며 통일신라시대 중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 남쪽에 2개의 지주가 동서로 약 90m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미륵사지 출토 석조물
미륵사지 한쪽에 전시된 석조물들은 백제시대에서 조산시대가지 사용되던 것으로, 1980년부터 1994년가지 15년간 미륵사지 발굴 조사에서 거두어 정리한 것이다. 동원의 석탑에서 사용된 석탑 부재와 방형이나 원형 등 여러가지 형태의 초삭, 석등과 당간지주에 사용된 부재, 건물의 기초부에 사용된 기단석, 맷돌 등 22종류의 석조물 6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