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떠나는 산사 문화산책길 공주 마곡사 麻谷寺 Magoksa Temple
2020년 11월 22일 서울 출장중에 고속도로를 회피하여 국도로 올라가는 중에 들린 마곡사~~~전통과 불교의 문화가 잘 어우러진 사찰인 마곡사는 한국의 산사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7대 사찰중의 하나이다. 날씨도 좋지 않았고 시간도 늦었는데 언젠가는 한 번 더 여유있게 돌아봐야 할 곳이다.
충청남도(忠淸南道) 공주시(公州市) 사곡면(寺谷面) 운암리(雲岩里)의 태화산(泰華山)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본사(本寺)이다.
‘春마곡’이란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봄볕에 생기가 움트는 마곡사의 태화산은 나무와 봄꽃들의 아름다움이 빼어 난 곳으로 마곡사 사적입안(事蹟立案)의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640년(백제(百濟) 무왕(武王) 41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고려 명종(明宗) 때인 1172년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하고 범일(梵日) 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 (覺淳) 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도 세조가 이 절에 들러 ‘영산전(靈山殿)’이란 사액(賜額)을 한 일이 있었다.
신라의 고승 자장 율사가 창건할 당시만 하더라도 30여 칸에 이르는 대사찰이었으나 현재 마곡사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을 비롯한 대광보전(大光寶殿:보물 제802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사천왕문, 해탈문(解脫門) 등의 전각들이 가람을 이루고 있다. 이 밖에도 도량의 성보(聖寶)로는 5층 석탑(보물 제799호)과 범종(梵鐘: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괘불(掛佛) 1폭, 목패(木牌), 세조가 타던 연(輦), 청동 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가 있으며 감지금니묘볍연화경(紺紙金泥妙法蓮華經) 제6권(보물 제270호) 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이 보존되어 있다.
마곡사의 정문 해탈문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 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으며 태화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 즉 법계(法界) 에 들어가게 되며 ‘해탈을 하겠다’는 원력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 문인 마곡사 천왕문이 박공지붕집인 데 비해 해탈문은 추녀 밑에 처마의 하중을 받고 장식도 겸해 나무쪽을 짜 맞춘 도구를 여러 개 배치한 겹처마 팔작지붕집입니다.
대한민국관음성지 마곡사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모두 판장 벽으로 막았습니다. 공포(拱包)는 3제공 형식으로, 제공 조두형(鳥頭形) 돋을새김을 하고 있으며 제공에는 연꽃을 조각하였습니다. 정면의 중앙 칸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있으며 양편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과 보현(普賢) 및 문수동자상(文殊童子像)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태화산 남쪽 기슭에 있는 마곡사의 두 번째 문으로,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곡사의 첫 번째 관문인 해탈문은 겹처마 팔작지붕집이지만 천왕 문은 1출목 익공식(翼工式) 공포(拱包)를 짜 올리고 전후면 공포 사이에는 화반(花盤)을 하나씩 설치한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박공지붕집입니다.
대한민국관음성지 마곡사
중앙 칸에는 동서남북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인 사천왕상 (四天王像)을 조성해 안치했습니다.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며 내부에 걸린 편액(篇額)에는 “1910년 6월에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싸리나무 기둥 안고 돌면 아들을 낳는다는 대웅보전!
무슨 말이냐구요?
2층으로 된 대웅보전은 통층으로 전각의 내부에는 싸리나무 기둥이 네 개가 있는데 여기에도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설화의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사람이 죽어 저승의 염라대왕 앞에 가면‘그대는 마곡사 싸리나무 기
대한민국관음성지 마곡사
둥을 몇 번이나 돌았느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많이 돌수록 극락길이 가깝기 때문이지요. 아예 돌지 않았다고 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생에서 아들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곡사의 싸리나무 기둥을 안고 돌면 아들을 낳는다고 일렀다고 합니다. 이런 재미난 전설로 인해 지금도 이 싸리나무 기둥은 윤기가 나고 손때가 묻어있습니다. 아들을 낳고 싶은 아낙이 많아서이지요.
대웅전 혹은 대웅보전은 법화경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큰 영웅이라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석하시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마곡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801호로 1785년에서 1788년에 걸쳐 중수되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양옆에 약사여래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때의 부처님들은 공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를 대표하므로 삼세불이라고도 부릅니다.
백범당
마곡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이라는 건물이 있고 그 옆으로는 김구 선생이 해방 후 1946년 여러 동지들과 이곳을 찾아와 기념식수를 한 향나무가 아직도 파랗게 자라고 있다.
백범선생은 마곡사를 떠난 지 근 50년 만에 돌아와 대광보전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라는 원각경에 나오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이 향나무를 심었다 한다.
대한민국관음성지 마곡사
백범 선생은 동학교도에서 승려, 독립군, 상해 임시정부 초대 주석에 이르기까지 투쟁과 투옥 그리고 망명으로 점철된 삶이었지만 언제나 해방된 조국, 하나 된 조국의 뚜렷한 목표가 변하지 않았다.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선생의 고절한 생을 흠모하는 것이다.
백범 선생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6년 일본군 중좌를 살해하고 살인범으로 낙인찍혀 인천교도소에서 사형수로 복역 중 그곳을 탈옥하여 1898년 마곡사에서 은신하다가 하은당이라 불리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백범일지에는 그의 출가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사제(師弟) 호덕삼(扈德三)이 머리털을 깎는 칼(削刀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뚝 떨어졌다.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출가 당시의 착잡했던 심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지금도 마곡사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바위가 있고 지금은 마곡사와 공주 시청이 이곳 삭발바위와 마곡천을 잇는 다리를 놓아 백범교라 부르고 그곳에서 마곡천 절경을 굽어보는 마곡사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또한 마곡사 생태농장에서 군왕대로 이어지는 <백범 솔바람 명상 길>을 두어 마곡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1시간가량 산보하기 좋다.
백범 선생이 지냈던 백범당에는 백범선생의 진영(眞影)과 1946년 마곡사를 방문했을 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는데 백범 선생 뒤로는 왼쪽에는 완장을 찬 좌익이 서있고 오른 쪽에는 넥타이를 맨 우익이 서있다. 이렇듯 백범선생은 사상 보다는 하나 된 조국을 더 원하였다.
사진 옆에는 백범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친필 휘호가 있는데 그것은 서산대사의 선시로 다음과 같다.
앉은뱅이, 그가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부처님의 자비를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세세생생 회향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날은 그가 부처님께 공양 올릴 삿자리를 짜기 시작하면서 앉은뱅이로서의 삶을 거두고 걸을 수 있게만 된다면, 그 자비광명을 얻게 만 된다면 이생을 넘어 세세생생 보시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맹세하고 부처님께 의지하며 생활한지도 어느덧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너무도 주제 넘는 소원을 품었던 터라 더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대한민국관음성지 마곡사
'내가 가진 업보가 그 얼마나 큰데 감히 부처님께 그런 소원을 빌다니! 얼마나 더 공덕을 쌓아야 그 동안 지은 억겁의 죄업을 다 씻을 수 있을 것인가, 슬프도다 슬프도다.’
지난 100일 동안의 기도 끝에 깨달은 것은 첫째도 참회요, 둘째도 참회였다. 그러한 나날이 계속 될수록 그는 걷게 되는 것을 염원하기보다는 길가에 무심히 핀 들꽃이 소중하고 그것이 살아있음을,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며 그 무엇에건 감사하게 되었다. 들꽃과 함께 호흡하고 나를 느끼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는 부처님께 감사했다. 일체의 삼라만상에 부처님의 자비를 회향하겠노 라고 다짐하는 날이 늘어갔다. 그렇게 100일이 채워졌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삿자리가 완성되었다. 그는 부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치 않은 다리를 끌고 부처님께 기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지극한 마음으로 절을 올리고 법당을 나왔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그가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는 어느새 걷고 있었다. 그는 그 파란 하늘과 푸른 숲, 무심히 흐르는 마곡천을 바라보며 부처 님의 자비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또 다짐했다. 이 같은 부처님의 자비를 하늘과 바람과 나무와 숲,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이들에게 회향하겠노라고, 그리하여 나누는 삶, 자비의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대광보전에는 ‘삿자리를 짠 앉은뱅이’ 전설이 담겨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법당 안에 삿자리가 깔려 있었습니다.
대광보전은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 1788년에 중창되었으며 보물 제80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광보전 내부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건물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도록 특이하게 봉안되어 있습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님으로, 진리의 몸이 온누리에 두루 비치는 광명의 빛을 내어 모든 이들을 지혜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대광보전의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1788년 조성된 이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6대보살, 10대 제자, 용왕과 용녀, 사천왕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비로자나 부처님 뒷벽에는 18세기 후반 조선회화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백의수월관음도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환희심을 불러일으키는 관음보살님으로 이름나 있습니다.
나라의 기근 막는 오층석탑
대광보전 앞에 위치한 오층석탑은 보물 제799호로, 일명 다보탑 또는 금탑이라고도 부릅니다.
탑의 2층 네 면에는 소박한 솜씨로 ‘사방불’이 양각되어 있으며 상륜부에는 청동제인 풍마 등이 조 성되어 있습니다. 라마식 보탑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원나라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방불이란 동서남북의 방위개념으로 모든 방향을 포괄하는 상징 이기도 하므로 사방불은 모든 공간에 부처님이 영원히 거주한다는 불신상주의 전형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관음성지 마곡사
현재불에서 과거불과 미래불이라는 삼세불로의 확대는 시간을 횡으로 가르고 다시 공간적으로 투영되어 사방(四方), 팔방(八方), 시방(十方)에 현재불이 등장함으로서 현재의 다방불, 천불, 삼 천불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상적 경향은 모든 중생이 본래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이미 깨달은 상태에 있다는 내재불 사상으로 발전했습니다. 오층석탑에는 나라의 기근을 3일간 막을 수 있다는 전설도 전해 내 려오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을 말하니 무섭다구요.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자연의 이치는 생(生)을 간직한 모든 이에게 평등합니다. 죽음 역시 그렇지요.
당신은 업보와 윤회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고 있습니까.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리 확신하지는 못할 겁니다.
명부전은 죽음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면서 그 동안의 업장을 참회하고 소멸하는 기도 처입니다.
대한민국관음성지 마곡사
지장보살님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까지 다 구제할 것을 서원하신 보살님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지장보살님께 기도하면 과거와 현재의 모든 업보와 죄를 소멸할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있는 명부전은 특히 군왕대의 좋은 기운이 모인 곳으로, 참회 정진에 특히 좋은 정진 터입니다.
마곡사의 명부전은 1939년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는 전각입니다. 건물에는 지장보살님을 중앙 불단에 모시고 있으며 좌우에 ‘ㄷ’자형의 불단을 만들어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님을 모셨습니다.
영험의 기운 응집되어 있는 영산전
“예가 어진 정승과 용맹스러운 장수를 만들어 낸다는 태화산 군왕대의 혈 자리라.”
마곡사의 영산전은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곡사에서 가장 영험이 큰 전각으로, 특히 어진 정승과 용맹스러운 장수를 만들어 낸다는 군왕대의 모든 기운이 모여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라의 큰일을 할 인재 배출을 원하는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 소원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관음성지 마곡사
영산전은 현재 남아있는 마곡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650년에 중수돼 현재 보물 제80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영산전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목불 7구가 남아있습니다. 사적입안의 기록에 따르면 영산전에는 세조의 친필인 방서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영산전은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던 당시의 광경인 영산회상을 재현해 모신 곳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과 10대 제자, 16나한 혹은 500나한을 모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독 마곡사의 영산전에는 한 가운데에 과거칠 불을, 그 주위에 1000분의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과거칠불이란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이 세상에 출현하였다고 하는 일곱 분의 부처님을 일컫습니다.
마곡사 현판은 근대 서화가인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 1868~1933) 의 글씨이다. 모든 서법에 자유로왔으며 특히 대필서(代筆書)가 당대 에 독보적이었다고 한다. 현판 양족을 초화 와 화훼로 꾸미고 초서로 썼다. 김규진의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이며, 그 외 백운거사(白雲居士) 취옹(醉翁) 만이천봉주인(萬二千奉主人) 등 10여 개가 있다. 평남 중화 출생. 8세부터 장인 이소남(李小南) 에게 글씨를 배우고 18세 때 청(淸)나라에 유학하여 서화(書畵)의 명적(名蹟)을 연구하였다. 전서(專書), 예서(隸書), 해서(骸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모두 묘경(妙境)을 이루었고, 산수화 화조화 (花鳥畵)를 잘 그렸으며 특히 난죽(蘭竹)은 절묘하였다. 그는 사군자(四君子)도 즐겨 그렸고 글씨는 대자(大字)를 특히 잘 썼다. 영친왕이은(英親王李垠)에게 서법(書法)을 가르쳤다. 한국 최초로 사진술을 도입하고 어전(御前)사진사가 되었다. 한편, 안중식(安仲植) 조석진(趙錫眞)과 함께 서화협회를 창설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경향 각지에서 화전을 개최하여 서화 예술의 계몽에도 진력하였다. 저서에 <해강난죽보><육체필론><서법진결><금강유람가> 작품으로는 글씨에 <기법보살><천하기절><금수강산><대웅전><백마장강><촉석루><가야산해인사><보신각><희정당대조전><태극전> 그림에 <외금강만물상도><소상대죽도><대부귀길상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