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시가지의 중심을 관통하는 도로를 지나다 천변쪽으로 누각이 보여 차를 세웠다. 창구동 1-1번지 조양각이 있는 조양공원이다.
영천시는 조양각 일대를 조양공원으로 조성했는데 조양공원에는 왕평 이응호의 황성옛터 노래비, 한국 여성 최초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던 여류소설가 백신애 표석비, 산남의진비, 조선 통신사의 길 비 등 이 있다. 바로 옆에는 영천문화관이 있다.
조양각은 금호강 벼랑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명원루 또는 서세루(남천 쪽에는 서세루 라고 쓰여 있는 편액이 걸려 있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려 공민왕 17년에 당시 부사였던 이용과 향내 유림들이 합심하여 지었다. 원래 조양각을 중심으로 좌우에 청량당과 쌍청당 등 여러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인조 1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조양각은 영천지방 문화의 상징으로 영남 7대 누각 중 하나로 꼽힌다.
조양각은 진주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영남삼루로 꼽혔고 안동의 영호루, 울산의 태화루, 양산의 쌍벽루, 김천의 연자루와 함께 영남칠루로 불리기도 했다. 1981년 4월 2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남천쪽에서 바라본 조양각 서세루 편액이 걸려있다.
영조 18년 (1742)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떨치던 윤봉오가 조양각을 중창하면서 서세루라는 현판을 써 달았다고 한다. 조양공원에서는 천변공원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목조데크가 조성되어 있다.
조양각 안에는 포은 정몽주, 율곡 이이, 노계 박인로, 사가정 서거정, 점필재 김종직 용재 이행, 창건자 이용 등 명현들의 기문 15편과 시 63편이 목판으로 걸려 있다.
조양각은 2단으로 쌓아서 만든 기단 위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누각 안에는 포은 정몽주의 「청계석벽」 등 시문(詩文, 시가와 산문을 아울러 이르는 말) 70여 점이 걸려 있다.
왕평 이응호의 황성옛터 노래비
영천문화원
산남의진비(山南義陳碑)
산남의진비는 구한말 일본의 국권침탈에 대응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정환직(鄭煥直)[1844~1907]과 그의 아들 정용기(鄭鏞基)[1862~1907] 의병장을 비롯해 수많은 장병들의 공훈을 추모하기 위해 1963년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산남의진기념사업회에서 건립했다.
산남의진비 좌측에는 ‘대장정공양세순국기념(大將鄭公兩世殉國紀念)’ 우측에는 ‘산남의진비(山南義陣碑)’ 라 새겨져 있다.
조선 통신사의 길 비 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우리나라 통신사가 국서를 들고 일본으로 가던 중 영천에 머물렀다는 기념비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왕래 400주년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조선시대 경상도 관찰사와 영천 군수들의 선정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