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564호 창녕 영산 만년교 昌學 靈山 萬年橋
Mannyeongyo Bridge in Yeongsan-myeon, Changnyeong
영산향교를 찾아 가는길 창녕군 영산면 원다리길에 있는 보물 제 564호인 만년교에서 잠시 쉬어간다. 쏟아지던 빗방울도 조금씩 잠잠해져 무지개다리를 건너 호국공원을 산책하기에는 딱 좋았다.
창녕 영산 만년교는 창녕군 영산면 호국 공원 안에 있는 길이 13.5m, 너비 3m의 무지개다리이다. 하천 양쪽의 큰 바위 위에 화강석을 반달 모양으로 무지개처럼 쌓고 그 위에 돌을 올린 다음 흙을 깔아 길을 만들었다. 만년교는 만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 다리라는 뜻인데,다리 사이로 흐르는 개천이 남산에서 흘러내린다 하여 남천교(南川橋)라고도 하며, 다리를 놓은 고을 원님의 공덕을 기르는 뜻에서 원다리(院다리)라고도 부른다.
정조 4년(1780)에 석공 백진기가 처음 다리를 만들었고, 고종 29년(1892)에 영산현감 신관조가 석수 김내경을 시켜 다시 지었다. 만년교는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멋을 지닌 무지개다리로,조선 후기 홍예교(紅霓橋 무지개다리)를 세운 방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다리 남쪽 입구에 있는 비석에는 큰 글씨로 ‘萬年橋’(만년교)라 새겨져 있고, 그 끝에 ‘十三歲書’(십삼세서)라는 작은 글씨가 덧붙여 있는데 전설이 있다.
만년교를 처음 세울 무렵 영산 고을에는 신통한 필력을 지닌 열세 살짜리 신동이 살고 있었다. 다리가 완공되던 날 밤 그 소년이 꿈을 꾸었는데, 자신을 산신이라고 밝힌 한 노인이 나타나, “듣건대 네가 신필(神筆)이라 하니 내가 거닐 다리에 네 글씨를 한 점 새겨두고 싶다. 다리 이름은 만년교로 할 테니 써보도록 해라” 하고 당부했다. 노인이 사라진 뒤 소년은 먹을 갈아 그 밤이 지나기 전에 ‘萬年橋’ 석 자를 써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만년교 안내문에는 다리 주변에 ‘남천석교서병명(南川石橋序井銘)이라고 쓴 비석과 만년교라고 쓴 두 비석 중 하나는 필력이 신통한 열세 살 신동이 쓴 글씨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만 적혀 있다.
만년교는 개천 양쪽의 자연 암반을 바닥돌로 삼고 그 위에 잘 다듬어진 화강암 석재를 층층이 쌓아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이루고 있고 그 위로는 둥글둥글한 자연석을 쌓아 올리고 맨 위에 얇게 흙을 깔아 다리 위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았다. 노면은 곡선을 그리며 양 끝을 길게 늘이고 있어 다리의 분위기를 한결 아늑하게 해준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통행할 만큼 튼튼하여 홍수 등에도 전혀 피해가 없다고 한다.<문화재청 자료 참고>
만년교 세부 명칭
만년교의 수리전과 수리중 사진
만년교 주변은 총 165만㎡의 면적으로 1973년 도시공원으로 지정된 남산호국공원이 있다. 전국3대 국란 호국의 성지이며 3.1독립운동의 발상지로 공원내에는 임진왜란호국충혼탑, 3.1운동 봉화대 및 기념비, 625전쟁 영산지구 전적비가 있고 복원된 물레방아도 있다. 영산군이 경상남도 최초로 3·1운동이 일어났던 곳임을 기념하여 이곳에서는 매년 3·1절 기념식이 거행된다.
전제장군충절사적비각과 임진왜란호국충혼탑
임진왜란호국충혼탑에는 임진왜란 당시 화왕산에서 의병활동을 했던 곽재우 장군 등 21명의 호국영령이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화왕산승전도
전제장군충절사적비각
현감전제장군충절사적비
남산호국공원의 32기의 비석들은 창녕 남부지역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은 옮겨 세운 것이다.
물레방아